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강독 2일차 요약
철학하이데거존재와시간서론현상학역사성2026년 9월 7일
오늘은 서론 마무리. 그래도 생각보단 많이 읽었다. 30 페이지면 나름 느리진 않은 편인 듯... 근데 갑자기 난이도가 확 오르고 까먹고 있었던 배경 지식을 다수 요구해서 그거 다시 리뷰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많을텐데, 앞길이 꽤 험난해 보인다. 그리고 예전 강의록들 - 예를 들어 정지훈 교수님 '현상학'과 맹주만 교수님 '형이상학의근본문제' 등 - 다시 읽으면서 내 과제도 다시 봤는데 진짜 진짜 부끄럽다. 내가 저런 걸 내고 이 성적을 받았다는 게 정말 놀랍고 믿을 수 없을 따름이다.
...아무튼 갑자기 야밤에 뜬금없는 반성 타임이었는데, 서론은 이쯤 하고 이제 오늘 요약으로 들어가보자.
1일차 요약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상 그 자체에 기반한 존재론은 서양철학사를 흐르며 망각에 이름.
- 모든 학문 분야는 결국 자신의 관심 영역에 있는 존재자들이 어떤 존재자인지를 선제적으로 파악해야 성립되기 때문에, 존재론은 모든 학문의 기반이 됨.
- 인간, 즉 현존재는 이미 존재에 대한 이해를 선행적으로 갖고 있으나 이는 미약한 수준이기에, 해석학적으로 다듬고 살을 붙여나가야 함.
- 해석학적 방법론은
선이해 → 해석 → 선이해 수정 → 해석 → 선이해 수정의 과정이 반복되며 점층적으로 진행.
오늘 읽은 것
현존재의 근본적 존재 방식으로서의 시간성과 역사성
1일차에 살펴본 내용에 따르면, 존재의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행적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는 현존재(인간)의 존재구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었다. 과연 현존재는 어떤 존재구조 위에서 존재할 수 있는 걸까? 그 핵심에 시간성과 그로부터 비롯하는 역사성이 있다는 게 이번에 살펴볼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인간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존재한다. 정확히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현존재는 그의 과거로 '있다'." 이는 곧 과거가 현재의 배후에 밀려 흐릿해진 상태로 현재의 내가 구성되는 게 아님을 의미한다. 잘 생각해보면 과거의 경험은 시간적으로 과거에만 남는 게 아니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당시 내가 깨달은 바가 있었을 것이고, 그 깨달음은 현재의 나에게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나는 현재의 내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가능성과 자기 이해를 이미 자신의 현재적 존재방식 안에서 맡은 채 살아간다는 것이다.
또 인상 깊었던 부분은, 현존재가 역사성에 기반한 존재자임을 오히려 역사학이 없는 비역사학적 시대/문명이 증명한다고 말한 지점이었다. 우리는 돌을 보고 "돌이 침묵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침묵한다'는 동사를 쓸 수 있으려면 돌이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돌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일한 논리로, 인간의 역사 중 일부에 대해 "저 시대를 살던 문명에 대해서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 - 즉, 인간에게 비역사학적인 존재방식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 - 은 인간에게 역사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사성을 빼놓고 현존재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마음에 들었던 표현:
'따라서 현존재의 과거는 현존재의 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를 앞서서 인도하는 것이다.'
- 박찬국. (2014).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그린비.
존재물음의 역사에 관한 평가와 해체
현존재에게 역사가 성립되는 이유를 논증한 이후, 책은 존재론의 역사에 관한 그의 평가와 해체 과정을 소개한다. 순서는 칸트로부터 그리스까지 거꾸로 올라가는 흐름.
칸트
가장 먼저 나오는 철학자는 칸트다. 칸트는 하이데거가 비교적 높게 평가하는 유일한 철학자인데, 이는 칸트가 시간적 요소를 선험적 판단의 기틀에 포함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항상 눈과 귀 등을 통해 감각적인 데이터를 수용하고 이를 해석 및 종합하며 활동한다. 칸트는 이런 감각적 데이터를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인간 특유의 인식 능력을 감성이라고 지칭한다. 칸트는 이 감성의 순수한 형식이자 기틀(frame)이 시간과 공간으로 규정되고, 이것이 인간에게 선험적 - 인간의 경험을 앞서, 즉 이 지식을 얻기 위해 경험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 - 으로 주어져 있다고 말한다. 즉, 인간에게 있어 시간성은 감성의 기틀 안에서 근본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한편, 칸트에게 범주는 오성이 선험적으로 갖는 순수한 개념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개념에 해당하는 범주, 그리고 감성에 주어진 현상은 서로 성격이 다르다. 때문에 둘을 매개할 초월론적 도식이 필요한데, 칸트는 이를 초월론적 시간규정으로 설명한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칸트가 존재이해와 시간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에 가까이 접근했다고 평가한다.
다만 긍정적 평가만 있었던 건 아니다. 칸트는 인간이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선 깊게 탐구했지만, 정작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 자체가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 부분이 하이데거가 가장 주요하게 비판하는 지점이다.
데카르트
데카르트에 대한 비판도 칸트에 대한 비판과 그 이유가 비슷하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표현을 통해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규정한 근대 서양 합리론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코기토(이성과 사유)의 확실성은 확보했지만, 그 코기토가 말하는 ‘나는 존재한다’에서 인간의 존재가 어떤 존재방식인지는 묻지 않았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비판을 받았다.
고대 그리스
다시 고대 그리스로 돌아왔다. 고대 그리스 존재론에 대한 평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하이데거의 평가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존재라는 현상 자체로부터 존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하지만, 존재를 특정한 시간적 형식인 ‘현전’의 관점에서 이해하면서도 그 시간적 근거 자체를 명시적으로 문제 삼지는 않았다는 점은 비판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대충 다음과 같은 흐름이다:
- 고대 그리스어로 인간은 '초온 로곤 에콘' - '로고스'를 가진 동물 - 으로 정의됨.
- 여기서 '로고스'는 말을 비롯하여 담론, 이성 등의 의미를 가짐.
- 즉, 인간은 말하고 담론할 수 있는 생명체로 규정됨.
- 그리스어에서 '말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는 '레게인'.
- 한편, 그리스어에서 '지각하다', '파악하다', '사유하다' 등의 뜻을 가진 '노에인'이라는 동사도 있음.
- 파르메니데스는 이러한 노에인을 존재 해석의 중요한 실마리로 삼음.
하이데거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노에인과 레게인을 통해 존재자를 파악하는 그리스적 방식 안에 존재자를 현재적으로 현전시키고 파악하는 시간적 구조가 작동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 읽으면서 레게인과 노에인의 대상이 반드시 시각적으로 눈앞에 있음을 전제한다고 오해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어 우시아(οὐσία)는 일반적으로 '존재', '실체', '본질' 등으로 번역되고,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곁에 있음', '현존', '임재' 등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특히 이러한 표현들에 나타난 그리스적 존재이해를 ‘현전(Anwesenheit)’이라는 시간적 지평에서 해석한다. 즉,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현재적으로 현전하는 것으로 파악되는 경향이 고대 그리스 존재론에 이미 내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비판은 그리스 존재론이 시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리스인들은 존재를 이미 ‘현전’이라는 특정한 시간적 양태를 통해 이해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존재이해가 시간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는 사실과 그 근거를 명시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고대 존재론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해체하여 다시 살펴보려는 이유 중 하나다.
현상학적 탐구 방법
책은 하이데거가 존재물음을 수행하는 방법론으로 현상학을 들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럼 여기서 현상학에 대해 알아봐야 할 필요가 생긴다.
사태
아마 현상학에 관한 가장 유명한 정식 중 하나는 "사태 자체로!" - 독일어로는 "zu den Sachen selbst!" - 일 것이다.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이 대표적으로 내세운 구호로서, 전승된 학설이나 미리 만든 개념을 사태 위에 강제로 덮어씌우지 말고, 문제되는 사태 자체가 어떻게 주어지고 드러나는지를 그 사태에 맞추어 탐구할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여기서 사태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탐구에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바로 그 대상이나 내용 자체라고 생각하면 어렵지 않다.
사태는 탐구에서 문제가 되는 바로 그 사태 또는 대상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 우리가 갑자기 망치에 대해 연구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 때, 우리는 "망치는 질량 X g, 길이 Y cm를 가진 물리적 객체다." 또는 "망치는 금속 재질의 머리와 나무 또는 고무가 덧대진 긴 막대로 구성된 것이다."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 두 설명이 틀린 건 아니다. 망치를 질량과 재료를 가진 물리적 대상으로 파악하는 방식 역시 충분히 가능하고 정당하며, 특정한 연구 목적에서는 매우 유용한 접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이러한 물질적 관점에서의 접근이 파생적인 접근이고, 더 근원적인 일상적 교섭에서 우리는 망치를 우선 사용하는 도구로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현상학은 이처럼 전승된 개념이나 특정한 이론적 틀을 무비판적으로 대상에 앞세우는 대신, 그 대상이 실제로 어떻게 경험되고 스스로를 드러내는지를 사태 자체에 맞추어 탐구하려 한다. 즉, 미리 마련된 설명보다 대상 자체가 어떻게 주어지고 드러나는가를 우선해서 살펴보라는 것이 "사태 자체로!"라는 구호가 가지는 의의다.
하이데거의 현상 정의
하이데거는 '현상'의 그리스어 어원인 '파이노메논'으로부터 시작한다. '파이노메논'은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뜻을 가진 '파이네스타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현상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스스로를 그 자체로부터 드러내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존재자가 자신을 드러낸다고 해서 언제나 자신이 실제로 그러한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존재자는 자신을 그 자체가 아닌 것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경우를 가상(Schein)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가상은 현상과 완전히 별개의 것이 아니라, 존재자가 스스로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자신이 실제로 그러한 것과는 다르게 드러내는 현상의 결여된 변양이라고 볼 수 있다.
왜 가상이 중요한가?
가상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가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이 곧 그것이 언제나 완전하고 왜곡 없이 드러난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게 현상학이 특별히 밝혀야 할 존재 역시 존재자 뒤편에 숨어 있는 별도의 실재가 아니라, 존재자에 본질적으로 속하면서도 우선 대부분의 경우에는 은폐되어 있거나 가려져 있는 것이다. 현상학은 이렇게 은폐된 존재를 그 존재자가 스스로 드러내는 데서부터 밝혀내려고 한다.
이러한 은폐와 드러남의 관계는 하이데거가 진리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와도 연결된다. 하이데거는 이 단어를 부정 접두사 a-와 은폐·망각을 뜻하는 lēthē 계열의 말로 해석하여, 비은폐성(Unverborgenheit)이라는 의미를 끌어낸다. 따라서 여기서 진리는 우선적으로 어떤 것이 은폐에서 벗어나 그것이 그러한 대로 드러나 있음을 의미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존재의 문제도 이와 비슷하다. 존재는 존재자와 별개로 그 뒤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존재자가 우리에게 드러날 때 이미 그 존재자에 속하면서 그것의 의미와 근거를 이루지만, 우리는 우선 대부분 존재자 자체에만 주목하기 때문에 그 존재는 은폐될 수 있다. 또한 서양 존재론의 전통 속에서 전승된 존재개념들이 자명한 것으로 굳어지면서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 역시 가려져 왔다. 따라서 현상학은 존재자 뒤에 있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에 속하면서도 은폐되어 있는 존재를 현상으로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현상학의 정의
길고 긴 배경 설명을 지나 현상학의 정의에 왔다. 현상학을 그리스어로 정식화하면 "레게인 타 파이노메나"로 쓸 수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레게인'의 근본적인 기능을 단순히 소리를 내어 말하는 데서 찾지 않고, 말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 즉 아포파이네스타이에서 찾는다.
한편, 현상의 정의 역시 그리스어 '파이노메논'에서 출발하며 그 의미는 스스로를 그 자체로부터 드러내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럼 다음 식이 성립한다:
현상학 = 레게인 타 파이노메나 = 레게인 + 파이노메논 =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그 자신으로부터, 그 자신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그대로 보이게 하는 학문
현상학이 존재론에 적용되는 방법
현존재의 현상학은 해석이라는 방법론을 가진다. 이 때 해석학은 존재론에서 3가지 의미를 가진다:
- 존재의 진리와 현존재의 존재구조에 관한 해석
- 존재의 진리와 존재자에 대한 연구(존재론)를 통해, 이에 기반하는 다른 학문(영역존재론)이 가능한 이유에 대한 해석
- 더 나아가, 모든 존재자에 대해 앞서는 현존재의 존재구조인 실존에 대한 해석
1일차 내용과도 비슷하지만 존재는 모든 존재자를 포괄하는 최고의 유(종류)는 아니지만, 모든 존재자와 연관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또한 이 존재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무와 대비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존재라는 개념은 모든 존재자를 초월하고 있으며, 이러한 초월적 개념인 존재에 대한 물음이 가능한 현존재의 실존성의 근본구조가 먼저 파악되어야만 그 뒤를 잇는 모든 물음에 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오늘 질문한 것
1. 역사성, 역사, 역사학
질문
“어떤 시대가 비역사학적으로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왜 오히려 역사성의 증거가 되는가?”
요약
핵심은 ‘비역사학적’과 ‘비역사적’을 구분하는 것이다.
- 역사성(Geschichtlichkeit): 현존재가 과거를 물려받고, 현재를 살며,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존재하는 방식
- 역사(Geschichte): 그런 역사적 존재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과 전승
- 역사학(Historie): 역사를 명시적으로 탐구하고 기록하는 학문적 활동
하이데거에게 역사학은 역사성의 원인이 아니라 역사성에 기반하여 가능한 하나의 활동이다.
따라서 어떤 시대가 역사를 학문적으로 기록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시대의 사람들이 여전히 과거를 물려받고 그 영향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들은 이미 역사적으로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존재한다 → 역사학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역사학이 없음’은 역사성 자체의 부재가 아니라 역사성이 비명시적으로 작동하는 결여적 양상이다.
출처: Heidegger, Sein und Zeit, §6.
2. ‘천착하다’의 의미
질문
“칸트는 시간도식의 고유한 구조와 기능에 천착할 수 없었다”에서 ‘천착하다’란?
요약
천착(穿鑿)하다는 어떤 문제나 현상의 내부를 깊이 파고들어 자세히 연구하다라는 뜻이다.
이 문맥에서는:
칸트가 시간을 전혀 분석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전통적인 시간이해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시간도식의 더 근원적인 구조까지 충분히 파고들지 못했다는 뜻이다.
3.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와 우시아(οὐσία)
파루시아 — 임재
일반적으로 παρουσία는:
- 곁에 있음
- 현존
- 도래, 도착
등을 뜻한다.
하이데거는 이 단어에서 특히 ‘현재에 현전해 있음’이라는 시간적 의미를 읽어낸다.
우시아 — 실체 / 본질 / 존재
οὐσία는 일반적인 그리스 철학에서는 주로:
- 실체
- 본질
- 존재
등으로 번역된다.
따라서 οὐσία = 현전성이라고 단순히 사전적 의미로 외우면 안 된다.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의 존재이해를 해석하면서 οὐσία의 배후에서 ‘지속적으로 현전해 있음’이라는 시간적 의미를 읽어낸다.
핵심: 그리스어의 일반적 뜻과 하이데거의 철학적 해석을 구분할 것.
출처: Heidegger, Sein und Zeit, §6.
4. ‘현-재’와 Gegenwart
질문
‘현-재’는 하이데거가 만든 새로운 단어인가?
요약
박찬국 교수의 ‘현-재’에 대응하는 독일어는 Gegenwart이며, 독일어에서 원래 ‘현재’를 뜻하는 일상어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새로 만든 조어는 아니다.
다만 하이데거는 이를 통속적인
과거 — 지금 — 미래
의 가운데 점으로서의 현재와 다르게 사용한다.
후반부 시간성 분석에서:
Zukunft— 장래Gewesenheit— 기재, 이미-있었음Gegenwart— 현-재
를 시간성의 서로 얽힌 구조로 분석한다.
박찬국 교수의 ‘현-재’라는 표기는 일상적 ‘현재’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Gegenwart를 구별해 읽도록 하는 번역상의 장치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또한 다음은 서로 다른 원어다.
- Dasein → 현존재
- Gegenwart → 현-재 / 현재
- Anwesenheit → 현전성
출처: Heidegger, Sein und Zeit, §§65, 68.
5.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와 진리
질문 1
알레테이아는 a-와 letheia로 나눠서 이해할 수 있는가?
요약
하이데거식 해석에서는 대체로 그렇다. 다만:
a-는 부정 접두사lēthē계열은 망각, 감춤, 은폐
쪽 의미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ἀλήθεια를:
비은폐성(Unverborgenheit), 감춰져 있지 않음, 드러남
으로 읽는다.
단, 이것을 단순한 사전적 사실로 보기보다는 하이데거의 철학적·어원론적 해석으로 이해해야 한다.
6. 진리의 ‘일차적’ 의미
질문
“대상과 표상의 일치”가 알레테이아의 ‘일차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말에서 ‘일차적’이란?
요약
여기서 일차적(primär)은 단순히 1번, 2번, 3번이라는 수적 순서가 아니라:
- 더 근원적인
- 더 기초적인
- 다른 의미가 그것에 의존하는
이라는 뜻이다.
하이데거가 보는 진리의 구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존재자가 드러남 / 비은폐
→ 그 존재자에 대한 말·판단이 가능
→ 판단과 대상의 일치 여부를 논할 수 있음
따라서 전통적인 진리관인:
진리 = 판단/표상과 대상의 일치
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더 근원적인 비은폐성에 의존하는 파생적 진리 개념으로 본다.
일차적 진리 = 존재자가 은폐에서 벗어나 드러나는 것
출처: Heidegger, Sein und Zeit, §7.
7. 철학 일반에서의 ‘탁월함’과 ‘테제’
탁월함
고대 그리스 윤리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문맥에서 ‘탁월함’은 흔히 aretē(ἀρετή)의 번역어로 사용되며, 덕(virtue) / 탁월성(excellence)을 뜻한다.
다만 철학 글에서 ‘탁월하다’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항상 aretē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테제(thesis)
일반적인 철학적 의미에서 논증을 통해 세우고 옹호하려는 핵심 주장·입장을 뜻한다.
“이 글의 테제가 무엇인가?” = “저자가 최종적으로 옹호하려는 핵심 주장은 무엇인가?”
8. 하이데거 문맥에서의 ‘탁월한 의미의 현상’
질문
“탁월한 의미에서 현상이라고 일컬어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서 ‘탁월한’은 어떤 뜻인가?
요약
여기서 ‘탁월한’은 아리스토텔레스의 aretē와 관계가 없다.
원문은:
in einem ausgezeichneten Sinne
이며 뜻은:
- 특별히 두드러진
- 본래적인
- 엄밀한 의미에서 핵심적인
정도다.
하이데거는 넓은 의미에서 ‘현상’을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현상학이 특별히 밝혀야 하는 탁월한 의미의 현상은:
평소에는 자신을 직접 드러내지 않지만, 드러나는 존재자에 본질적으로 속하면서 그 존재자의 의미와 근거를 이루는 것
이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여기서 지목하는 것은:
존재자의 존재(Sein des Seienden)
이다.
즉: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것
→ 존재자
그 존재자가 그렇게 존재할 수 있게 하면서
평소에는 은폐되어 있는 것
→ 존재
현상학의 핵심 과제
→ 은폐된 존재를 드러내는 것
출처: Heidegger, Sein und Zeit, §7C.
오늘 읽은 서론의 핵심 흐름
오늘 다룬 내용을 하나의 흐름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역사적이다.
↓
따라서 역사학 역시 현존재의 역사성에 기반한 하나의 가능성이다.
↓
서양 존재론은 존재를 주로 ‘현전’이라는 시간적 관점에서 이해해 왔다.
↓
하이데거는 이 전통적 존재이해를 파괴(Destruktion)하고
그 근원적 시간적 조건을 다시 묻고자 한다.
↓
이를 위해 현상학을 방법으로 사용한다.
↓
현상학의 핵심은 단순히 눈앞에 드러난 것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은폐되어 있으면서도 존재자의 의미와 근거를 이루는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
진리 역시 단순한 ‘판단과 대상의 일치’보다 더 근원적으로
존재자가 은폐에서 벗어나 드러나는 ‘비은폐성’으로 이해된다.
오늘의 한 줄 요약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이미 눈앞에 나타난 존재자를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존재자가 그렇게 드러날 수 있게 하면서 평소에는 은폐되어 있는 ‘존재’를 다시 드러내려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