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강독 3일차 요약

철학하이데거존재와시간현존재존재론실존철학

2026년 9월 12일

오늘 읽은 것

지금까지는 서론이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1장에 돌입했다.

오히려 1장이 더 쉽다. 보니까 서론은 뒤에서 다룰 내용들이 앞에서 미리 나오고 막 뒤죽박죽 뒤섞여 있어 난이도가 매우 어렵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제 1장부터는 순차적으로 그의 체계를 설명하려고 하니까 술술 읽히더라. 그래도 한 번에 많이 읽으면 정리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오늘도 비슷하게 한 30 페이지 정도로 끝냈다.

오늘 읽은 파트의 주 내용은 현존재의 존재 분석이다. 즉, 인간의 존재 방식과 그 방식이 가능하도록 하는 존재 구조는 어떤지 알아보게 될 것이다.

현존재의 존재방식

현존재(인간)와 다른 존재자들을 구분짓는 가장 큰 차이는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 존재자라는 점이다.

하이데거에게 중요한 차이는 동물이 단순히 본능에 따라서만 움직인다거나 기계와 같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든 이해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가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되는 존재자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동시에 수많은 존재자 중 현존재가 존재물음을 던질 수 있는 존재자이기에,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럼 현존재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현존재의 특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성과 육체의 합으로 환원되지 않는 현존재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이성을 가진 생물이나 육체, 영혼, 정신을 더한 것으로 정의하는 주장들을 비판한다.

육체, 영혼, 정신은 각각 탐구할 수 있는 현상이지만, 그것들의 존재방식을 단순히 더한다고 해서 현존재 전체의 존재방식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인간을 생물 + 이성처럼 이해하면 생물의 존재방식도, 현존재의 독특한 존재방식인 실존도 모두 충분히 밝히지 못하고 둘을 결합하게 된다. 따라서 하이데거에게 필요한 것은 이성이나 육체 중 어느 하나를 인간의 근원적 실체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 전체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먼저 묻는 것이다.

현존재는 가능존재다

현존재는 가능존재다. 다시 말해 가능성이 곧 현존재를 정의한다.

이 지점에서도 현존재와 눈 앞에 있는 사물의 존재방식을 비교해볼 수 있다. 일반적 존재자는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다. 나무는 나무로서, 장난감은 장난감으로서, 그렇게 정체성이 고정되어 있고 그 외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현존재의 존재규정은 그런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그때그때 가능한 존재방식이다. 따라서 현존재는 이미 완성된 무엇에 가능성이 추가로 붙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자신의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가능성은 단순히 선택지가 많다는 뜻보다 현존재가 언제나 자신이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살아내야 한다는 뜻에 가깝다.

예를 들어,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을 지나오며 수많은 선택을 했고 지금은 또 어떤 기업에 지원할지 고민하고 있다. 이처럼, 현재의 나를 이미 완성된 사실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지를 고민하며 현재의 행동과 삶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존재로서 현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현존재의 가능적 특성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현존재가 가능존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현존재가 자신의 현재의 삶의 방식을 문제 삼으면서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 박찬국. (2014).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그린비. p 80.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은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표현이다. 개인적으로 하이데거의 가능존재에 관한 본래 정의는 가치중립적인 정의에 더 가깝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의 가능존재에 관한 기본 규정 자체는 '좋은 가능성'을 선택한다는 가치판단보다, 현존재의 존재 자체가 가능한 존재방식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의가 이렇게 가치중립적으로 내려진 것과는 별개로, 하이데거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삶의 방향이 있을 수는 있다. 나는 바람직한 삶을 묻는 질문에 대한 하이데거의 답이 (바로 뒤에서 살펴볼 개념인) 본래성과 비본래성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정의 자체는 가치중립적으로 잘 내려졌어도, 하이데거에게 바람직한 삶에 대한 본인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 가치관이 책에 자연스레 녹아난 것 같다는 느낌이다.

본래성과 비본래성

본래성과 비본래성은 현존재가 언제나 자기 자신의 것인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 떠맡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본래성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인수하고 떠맡는 방식을, 비본래성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스스로 떠맡지 못하고 일상적인 사회나 세상의 해석에 자신을 내맡기는 방식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본래성을 단순히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자기 의지로 선택하는 것, 비본래성을 사회나 타인이 대신 결정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접근이다. 현존재는 애초부터 타인과 사회가 이루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며, 본래적인 삶에서도 그 세계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의 내용이 사회적으로 주어졌는지가 아니라, 그 가능성을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으로 떠맡고 책임지는 방식에 있다. 또한 비본래성이 도덕적으로 나쁘거나 게으르다는 뜻도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대부분의 현존재는 비본래적인 삶을 산다. 남들이 시키는 일을 하고, 남들의 인정을 받아가며, 남들이 (사실상) 지시하는 삶의 방향대로 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아가다 뒤를 보면 문득 알 수 없는 허무함이나 공허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갑자기 모든 것들이 하기 싫어진다거나, 삶이 재미가 없어진다거나. 하이데거는 이것이 바로 비본래적인 삶 아래 깔려 심연에 숨어 있던 우리 자신의 고유한 존재가 "나 여기 있어"라고 일차적인 고지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불안'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데, 이는 이후에 다룰 현존재가 일상적 자기이해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에 직면할 계기로서 작용하게 된다.

실존

하이데거에게 실존(Existenz)은 현존재에게만 주어지는 고유한 존재방식 자체를 가리킨다.

특히 그는 실존(Existenz)과 눈 앞에 있음(Vorhandensein)을 명확히 구분한다. 실존은 현존재의 존재방식인 반면, Vorhandenheit는 좁은 의미에서 사물을 주제적으로 눈앞에 있는 대상으로 파악할 때의 존재방식이다.

이 때 눈 앞에 있는 사물들의 특성은 범주(Kategorien) - 길이, 무게, 재질 등 - 으로 구분되는 반면, 현존재의 특성(구조계기)은 실존주(Existentialien)로 설명된다. 이 '실존주'는 어떤 역서에서는 '실존범주'로 번역되지만, 이렇게 표현하면 마치 '범주' 아래에 '실존범주'가 포함되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기에 '실존주'라는 표현으로 대체하지 않았나 싶다.

하이데거는 물건이 단순히 눈 앞에 존재하는 것과 현존재가 실존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눈 앞의 사물들을 파악할 때 사용하는 범주는 현존재를 파악할 때 사용하는 실존주와 분리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범주와 실존주는 포함 관계가 아니며 오히려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생물학을 현존재에 적용하는 것에 관해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생물은 현존재의 존재론으로부터 결여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 박찬국. (2014).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그린비. p 93.

하이데거의 요지는 생물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생물학이라는 존재적 학문만으로 현존재의 존재방식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에 가깝다. 생명은 그 자체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가지며, 하이데거는 그것이 단순한 눈앞에 있음도 현존재의 실존도 아니라고 본다.

또한 생물과 현존재의 관계를 단순히 현존재 = 생물 + 이성으로 보는 것도 틀리다고 말한다. 현존재를 육체, 영혼, 정신 또는 생명, 이성 같은 요소들의 단순한 합으로 계산하기 전에, 현존재 전체의 존재방식에 대한 이해가 먼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존재방식도 현존재와 구별되는 고유한 존재론적 해명이 필요하며, 하이데거는 이를 현존재의 존재론으로부터의 결여적 해석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오늘 질문한 것

1. Vorhandensein과 ‘눈앞에 있음’

질문

Vorhandensein은 서론에서 언급된, 존재를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이해하는 표면적 의미와 동일한가?

요약

대체로 같은 방향이지만, ‘눈앞에 보인다’는 시각적 의미로 이해하면 안 된다.

Vorhandensein / Vorhandenheit는 존재자를:

사용 맥락이나 실천적 관계에서 떼어내어, 그저 거기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파악하는 존재방식

을 뜻한다.

따라서 전자나 중력장처럼 직접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독립적 대상처럼 파악된다면 vorhanden의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를 Vorhandenheit가 아니라 Existenz라고 부른다.

사물 → Vorhandenheit / 현존재 → Existenz

출처: Heidegger, Sein und Zeit, §9.


2. 현존재가 ‘가능존재(Möglichsein)’라는 의미

질문

가능존재의 ‘가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 나은 미래에 도달할 가능성’으로 이해해도 되는가?

요약

Möglichsein은 기본적으로 발전 가능성이나 낙관적 잠재력을 뜻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핵심 표현은:

Dasein ist je seine Möglichkeit.
현존재는 그때그때 자신의 가능성이다.

현존재는 이미 완성된 속성들의 집합이 아니라, 언제나:

‘나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라는 가능성 속에서 자기 존재를 수행하는 존재

이다.

따라서 가능성에는 그 자체로 ‘더 좋음’이라는 가치판단이 포함되지 않는다. 현존재는 자신의 가능성을 선택할 수도, 놓칠 수도, 잘못 붙잡을 수도 있다.

또한 현존재의 가능성은 단순히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미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자기 이해와 행동을 이미 규정하는 존재방식이다.

출처: Heidegger, Sein und Zeit, §§9, 31.


3. 박찬국 교수의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한다”는 설명

질문

박찬국 교수는 가능존재를 설명하면서 “현존재가 자신의 현재 삶의 방식을 문제 삼으면서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가능성 자체는 가치중립적인데 왜 ‘보다 나은 삶’이라는 가치판단이 들어가는가?

요약

Möglichsein 자체의 엄밀한 정의에 ‘보다 나음’이라는 가치판단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9에서 하이데거는 가능존재를 곧바로:

  • 자신을 선택함
  • 자신을 획득함
  • 자신을 상실함
  • 본래성(Eigentlichkeit) / 비본래성(Uneigentlichkeit)

의 문제와 연결한다.

따라서 박찬국 교수의 “보다 나은 삶”은 Möglichsein의 정의라기보다:

현재의 존재방식을 문제 삼고,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보다 자기 자신의 것으로 떠맡는 방향

을 일상어로 풀어쓴 해설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단, 이를 ‘더 성공적·행복한·도덕적인 삶’이라는 의미로 읽으면 부정확하다.

또한 현존재를:

미완성 → 여러 선택 → 최종적 완성

이라는 목적론적 도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현존재는 존재하는 동안 원리적으로 자신의 가능성에 열려 있다.

출처: Heidegger, Sein und Zeit, §§9, 31.


4. “자신의 존재를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 대한다”와 고유성

질문

“인간은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서의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태도를 취한다”는 문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서 ‘고유성’은 무엇인가?

요약

원문은:

Das Seiende, dem es in seinem Sein um dieses selbst geht, verhält sich zu seinem Sein als seiner eigensten Möglichkeit.

즉: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서 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 여러 선택지 중 특별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 자체가 언제나 자신이 직접 살아내야 할 가능성이라는 뜻이다.

고유성의 두 층위

Jemeinigkeit — 각자성 / 언제나 나의 것임

현존재의 존재는 언제나 그때그때 나 자신의 존재이다.

이 존재는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내가 살아야 하는 내 존재다.

본래적이든 비본래적이든 모든 현존재가 갖는 형식적 성격이다.

Eigentlichkeit — 본래성 / 자기 것으로 떠맡음

언제나 나의 것인 그 존재를 실제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 떠맡아 존재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여기서 eigen은:

‘남들과 달리 독특하다(unique)’보다 ‘자기 자신의 것이다(own)’

라는 뜻이 핵심이다.

출처: Heidegger, Sein und Zeit, §§9, 12.


5. 고대 존재론의 ‘실체’와 logos / noein

질문

“개나 고양이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이미 그것들을 실체로서 이해한다”에서 ‘실체’란 무엇인가? 이것이 왜 logos와 noein에 연결되는가?

실체 — ousia(οὐσία)

여기서 실체는 물질(material)이라는 뜻이 아니다.

대략:

다른 것의 속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자로 있으면서 여러 속성의 주체가 되는 것

을 뜻한다.

예:

“이 고양이는 검다.”

에서:

  • 이 고양이 → 실체
  • 검다 → 질(속성)

이라고 볼 수 있다.

logos(λόγος)

하이데거는 logos를 단순한 ‘말’보다: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드러내는 것

으로 이해한다.

“이 고양이는 검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이미 고양이를 여러 속성이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존재자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noein(νοεῖν)

noein은 대략:

존재자가 무엇인지 지적으로 파악하는 것

을 뜻한다.

단순화하면:

  • noein → “이것이 무엇인가”를 파악
  • logos → “이것은 ~이다”라고 명시적으로 드러냄

따라서 고대 존재론은 존재자를 noein과 logos를 통해 파악하면서 이미 실체·질·양·관계 등의 범주 아래에서 이해한다고 하이데거는 본다.

출처: Aristotle, Categories; Heidegger, Sein und Zeit, §§7, 9.


6. 왜 ‘실존범주’가 아니라 ‘실존주(實存疇)’인가?

질문

박찬국 교수는 왜 Existenzialien을 ‘실존범주’가 아니라 ‘실존주’라고 번역했을까?

요약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하이데거가:

  • Existenzialien
  • Kategorien

을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존재규정으로 엄격하게 구별하기 때문이다.

Existenzialien을 ‘실존범주’라고 번역하면:

범주
└ 실존범주

처럼 Existenzialien이 Kategorie의 하위종처럼 보일 위험이 있다.

반면 실존주(實存疇)는 범주(範疇)에서 疇를 취해:

범주와 유사한 기능을 하지만, 범주 그 자체는 아닌 별도의 존재규정

이라는 차이를 번역어에 반영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단, 박찬국 교수가 직접 이러한 번역 이유를 명시한 자료를 확인한 것은 아니므로 이 부분은 추정이다.

범주(Kategorie) → 비현존재적 존재자의 존재규정
실존주(Existenzialien) → 현존재의 존재규정

출처: Heidegger, Sein und Zeit, §9.


7. 실존철학의 실질적 출발점

질문

실존철학의 실질적 개시자로 볼 수 있는 철학자는 누구인가?

요약

한 사람을 굳이 꼽으면 쇠렌 키르케고르가 가장 적절하다.

그 이유는 철학의 중심을 추상적인 ‘인간 일반’에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이 개별자인 내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라는 문제로 이동시켰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이후 실존철학의 주요 주제인:

  • 개별자
  • 선택과 결단
  • 불안
  • 절망
  • 자기 자신이 됨
  • 자기 삶을 스스로 떠맡음

등이 강하게 등장한다.

다만 엄밀하게는 하나의 창시자만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 19세기 주요 선구자 → 키르케고르 + 니체
  • 독일의 Existenzphilosophie 성립 → 야스퍼스 + 하이데거
  • 프랑스 실존주의 운동 → 마르셀, 사르트르, 보부아르

따라서:

실존철학의 가장 중요한 철학사적 출발점 = 키르케고르

정도로 기억하는 것이 적절하다.

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Kierkegaard”, “Existentialism”, “Karl Jaspers”.


8. 그리스도교의 ‘교의학’과 초월 이념

질문

“근대철학의 초월 이념은 그 뿌리를 그리스도교의 교의학에 두고 있다”에서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요약

교의학(dogmatics / dogmatic theology)은:

그리스도교가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핵심 교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설명하는 신학 분야

이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특히 문제 삼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인간론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을: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현재의 자기 자신을 넘어 신을 향하도록 된 존재

로 이해한다.

하이데거의 진단에 따르면 근대철학은 신 중심의 설명에서 벗어났지만:

인간은 현재의 자신에 머물지 않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다

라는 구조 자체는 여전히 계승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인간 → 자기 자신을 넘어 → 신을 향함

근대철학
인간 → 자기 자신을 넘어 → 이성·자유·자기실현 등의 가능성을 향함

처럼 목적지는 달라졌지만 ‘자기초월’이라는 인간 규정의 구조는 남아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이다.

출처: Heidegger, Sein und Zeit, §10.


오늘 읽은 제1장 핵심 흐름

오늘 질문을 하나의 흐름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전통 존재론은 존재자를
‘그저 거기에 있는 것(Vorhandenheit)’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
그러나 현존재는 사물처럼 완성된 ‘무엇’이 아니다.
↓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살아가는
가능존재(Möglichsein)다.
↓
따라서 현존재의 존재는 언제나
‘나 자신의 것(Jemeinigkeit)’이다.
↓
이 나의 존재를 자기 것으로 떠맡거나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본래성(Eigentlichkeit) / 비본래성의 문제가 가능해진다.
↓
그러므로 현존재를 사물에 적용하는
실체·질·양 등의 범주(Kategorien)로 분석해서는 안 된다.
↓
현존재에는 그에 고유한 존재규정인
실존주(Existenzialien)가 필요하다.
↓
이 분석은 전통적인 인간학과 신학적 인간 규정까지 거슬러 올라가
‘인간은 무엇인가’보다 ‘현존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먼저 물으려는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으로 이어진다.

오늘의 한 줄 요약

현존재는 이미 완성된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 자신의 존재를 가능성으로 떠맡아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물의 범주와는 다른 고유한 존재론적 분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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