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강독 4일차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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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23일

몇 군데 지원서를 쓰고 쉴 겸 다시 『존재와 시간』으로 돌아왔다. 휴식을 위해 철학서를 읽는 사람이라니 정말 기특한 취미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박수. 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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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겠다:

  •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 존재자라는 점에서 다른 존재자와는 다른 '현존재'로 불려야 한다.
  • 현존재는 가능존재다. 삶 자체가 가능성의 연속이고 끝없는 선택을 이어가야 하며, 그렇기에 현존재는 어떤 단적이고 정적인 무언가로 정의될 수 없다.
  • 현존재는 본래적으로 그리고 비본래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 때 삶의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으로 떠맡고 책임지는 삶을 본래적인 삶이라고 한다.
  • 실존은 현존재에게만 주어지는 고유한 존재방식이며, 실존은 존재자를 구분하는 범주와는 달리 실존주(Existentialien)라는 구조계기로만 밝혀질 수 있다.

오늘 읽은 것

현존재의 존재구조로서 세계-내-존재

하이데거는 먼저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라는 단어는 현존재의 존재구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 때 신경을 써야 할 표현은 '내'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세계 안에 존재한다'라는 의미의 독일어 문장을 'Ich bin in der Welt'로 쓰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bin'이 'in'보다 앞에 온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독일어로 'in(안에)'은 고대 독일어 'innan(거주하다)'와, 그리고 영어의 'be' 동사에 대응되는 'bin'은 'bei(곁에)'와 연결시킨다. 즉 현존재가 세계-내-존재에 단순히 공간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보다도, 현존재가 자신에게 친숙한 세계 속에서 거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거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과는 의미의 층위가 다르다. 거주한다는 것은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세계에 놓인 보도블럭 위 길을 걷고, 문을 열기 위해 자동문 버튼을 누르고, 못을 박기 위해 망치를 치면서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는, 단순히 세계 안에 물리적으로 있는 것보다는 더 다양한 양상의 상호작용을 여러 존재자들과 주고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정리하면 세계-내-존재라는 표현은 현존재가 세계에 몰입하며 살아내는 존재구조를 의미하며, 단순히 공간적/물리적인 표현과는 거리가 있다. 특히 하이데거가 이를 '<세계>-곁에-있음 (Ich bin bei der Welt)'이라고 표현하며 동시에 이를 현존재의 실존주(Existentialien) 중 하나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성과 현사실성

사실성(Tatsächlichkeit)과 현사실성(Faktizität)이라는 두 단어는 모두 사실에 관한 기술이지만 큰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강의를 듣기 위해 서울의 학교에 있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 문장에서 사실성을 따진다면 "강시운은 서울특별시에 있다"는 진술로 나타낼 수 있다. 내가 공간적/물리적으로 서울특별시 내에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편, 현사실성을 따질 경우 "나는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듣기 위해 서울의 중앙대학교에 있다"는 진술로 나타낼 수 있다. 이 문장은 단순히 공간적/물리적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의미 관계들과 그 의미 관계 간의 네트워크도 같이 포함하고 있다:

  • 철학에 대해 다루는 강의가 있다
  • 강의는 대학에서 들어야 한다
  • 서울에는 중앙대학교가 있다
  • 강시운은 중앙대학교 학부생이다
  • ...

더욱 정확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현존재라는 사실(Faktum)의 사실성(Tatsächlichkeit)을 우리는 현존재의 현사실성(Faktizität)라고 부른다. Die Tatsächlichkeit des Faktums Dasein ... nennen wir seine Faktizität.

조금 더 풀어 쓰면,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특정한 세계와 상황, 존재자들과의 관계 속에 놓여 있고 자신의 존재를 그러한 것으로 이해하면서 존재한다는 점이 현사실성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게 된다.

현존재의 존재는 마음씀

현존재는 다른 존재자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며 세계-내-존재로서 살아간다. 이 때 여기서 말하는 다양한 방식에는 선택하고, 포기하며, 도구로서 사용하고, 먹으며, 상실하거나 취득하고, 고찰하고 논의하는 방식 모두가 포함된다.

이 모든 방식을 하나의 단어로 일반화하면 '고려한다(Besorgen)'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 'Besorgen'이라는 단어를 현존재가 현존재 이외의 존재자들과 관계하는 방식으로 설명하며, 실존주(Existentialien)의 일종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향후 현존재의 존재를 마음씀(Sorge)으로 정의할 것인데, 이 내용은 추후 나올 예정이라 여기서는 맛보기 정도로만 언급한 듯하다. 마음 쓰고 고려하는 행위가 현존재의 실존주임을 알아두는 정도로만 넘어가면 될 것 같다.

현존재의 세계와 환경세계

이 단락은 현존재, 즉 사람과 동물을 비교하는 단락이다.

하이데거는 동물이 인간처럼 사고나 판단에 의해 행동하는 게 아니라, 충동에 의해 행동으로 이끌린다고 설명하고 있다. 가령 꿀벌이 꿀을 먹는 것은 '꿀을 먹고자 하는 충동'이 발생한 결과고, 반대로 꿀을 먹다가 그만두는 것은 '꿀을 더 빨아먹으려는 충동을 억제하는 충동'이 발생한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에게 있어 다른 존재자란 그저 충동 발생 및 억제에 관여하는 일종의 자극에 불과하다.

이처럼 동물이 살아가는 세계, 즉 다른 존재자들이 그 자체로 나타날 수 없고, 오직 충동의 자극으로만 받아들여지는 동물의 세계를 환경세계라고 한다. 반대로, 세계-내-존재가 살아가는 세계는 후설이 현상학에서 언급했던 생활세계인데, 이 부분은 조금 뒤에서 보충 설명을 이어가겠다.

전통존재론에서 세계-내-존재의 은폐

하이데거는 과거의 인식론을 비판하며 그 역사에서 세계-내-존재가 은폐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근대 존재론은 대부분 인간의 내부에 위치한 이성이 어떻게 외부에 있는 세계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밝히는 데에 집중한다. 가장 일반적인 인식은 인간 안에 있는 마음이나 영혼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고 이해하는 방식이다. 조금 더 전문적으로 말하면, 고립된 채로 존재하는 주관이 밖으로 나가 객관과 관계를 맺는다고 이해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식은 세계-내-존재의 하나의 양상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인식론자들은 인식이 세계-내-존재를 대표한다고 오해함으로써 그 의미가 왜곡되었다고 비판한다.

객관적 인식과 도구적 인식

여기서 객관적 인식이란 존재자를 물리적/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도구적 인식이란 존재자를 사용함으로써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의미를 드러내는 방식을 말한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생활세계 개념을 꺼내들며, 과거의 인식론자들처럼 객관적 인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구적 인식의 결여태라고 주장한다. 즉, 도구적 인식에서 무언가를 제외해야 객관적 인식이 된다는 것이고, 다시 말해 도구적 인식이 더 풍부한 형태의 인식이라는 결론도 같이 도출된다.

생활세계는 과학적/이론적 추상화 이전에 우리가 몸을 가지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면서 언제나 이미 친숙하고 의미 있게 경험하는, 모든 인식과 실천의 선행적 지평을 의미한다.

생활세계라는 표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존재자들의 무게와 질량을 따지는 방식 이전에 존재자와 자연스럽게 관계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자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 컵은 무슨 재질이고 무게는 얼마이며 지름은 어느 정도이다'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먼저 컵을 액체를 마시는 도구로서 사용하다가 언젠가 특정한 계기로 컵을 과학적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을 뿐. 즉, 우리는 존재자를 우리 삶에 유용한 도구로 사용하면서 그것들과 관계하며 그것이 세계-내-존재로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관점 하에서는 과학적 접근은 당연히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과학적 접근에서는 그 존재자가 인간과 관계하는 방식 - 인간이 해당 존재자를 사용하는 방식 - 을 결여한 채로 존재자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설은 과학적 세계가 생활세계에 기반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이건 현상학 얘기이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로 넘어가면 될 것 같다.

인식은 밖에서 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위 질문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외부에 대해 폐쇄된 인식의 상자 안에서 외부로 나가서 인식의 전리품을 가지고 들고 오는 게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말이다.

세계-내-존재라는 표현 자체가 현존재는 세계와 (넓은 의미에서) 함께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를 밖과 안으로 구분하기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 더 나아가,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존재자를 인식할 경우 현존재는 폐쇄되어 있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다. 현존재는 그때마다 이미 개시되어 있는 세계에 나타나 있는 존재자에 몰입해 있다. 즉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가 인식되어야 할 존재자를 규정하면서 그것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내면적 영역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는 대상에게로 나와서 외부에 있을 때에도 올바로 이해된 의미에서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즉 현존재는 대상과 관계하면서, 즉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항상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 박찬국. (2014).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그린비. p 111.

사실 설명이 어려워서 그냥 책 문장을 그대로 가져왔다. 이 설명보다 더 정확한 설명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

세계성

하이데거는 이제 세계-내-존재를 <세계>라는 세계 내 존재자를 실마리로 하여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이 세계성에 대한 이해.

이 때 주의해야 할 표현으로 2가지가 있다:

  • 세계적(weltlich)이라는 표현은 현존재의 존재양식을 가리킨다.
  • 세계 내부적(inner-weltlich)이라는 표현은 세계 내부에서 현존재의 눈 앞에 나타나는 존재자(Vorhandensein)들의 존재양식을 가리킨다.

하이데거는 세계성 분석을 위해 먼저 현존재가 살고 있는 가장 가까운 세계인 주위세계(Umwelt)로부터 시작한다.

도구성

세계성 분석을 위한 첫 단계로써, 그는 주위세계에 놓인 다양한 존재자들과 현존재 사이 관계 방식을 분석하며 시작한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하이데거는 이번에도 과학적 인식과 도구적 사용을 구분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특히 후자를 교섭(Verhalten)이라는 단어로 정의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존재자들을 사물(Ding)이라고 부르는 것을 경계하는데, 사물이라는 표현은 존재자들과의 교섭과 도구적 의미가 생략된 연장성, 물질성으로만 구성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하나의 도구에서 시작한 도구성이 도구 전체성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설명한다. 쉽게 말해, 하나의 도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도구는 항상 도구 전체로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강의실을 생각해보자. 강의실에는 프로젝터가 하나 있다. 이 프로젝터는 강의용 컴퓨터의 화면을 스크린에 띄우기 위한 것이다. 즉, 프로젝터는 강의용 컴퓨터와 스크린과 의존성을 가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도구는 반드시 다른 도구와의 의존성으로 표현되며, 이런 관계성을 끝까지 추적하다 보면 결국 모든 도구가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 때 각 도구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그 도구에 고개를 쳐박고 재질은 무엇인지 길이는 얼마인지를 따질 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도구에는 관심을 끄고 그 도구를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때 잘 드러난다. 컴퓨터로 타자를 칠 때 이 키보드의 생김새는 어떻게 키는 어떤 글꼴로 인쇄되어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는가? 아마 그런 경험은 거의 없을 것이며 보통은 키보드를 눌러 글자를 쓰는 데에 집중할 것이다. 즉, 도구의 의미는 그 도구를 더욱 더 활발하게 사용할수록 잘 드러나며 하이데거는 이렇게 도구를 사용하기 위한 고려에서 드러나는 도구의 존재양식을 도구성이라고 칭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도구의 특징을 '그 자체로 즉해 있음 (An-sich-sein)'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이 단어는 도구들이 도구로서 제대로 기능할 경우 오히려 도구가 자신을 부각시키지 않고 우리 눈에 띄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반대로, 우리가 도구 그 자체에 관심을 갖는 순간은 도구가 망가졌을 때다. 우리는 망치를 사용할 때 망치는 안 보고 못이 잘 박히고 있는지에만 집중하다가, 망치 손잡이가 부러지는 순간이 되어야 망치라는 도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즉, 도구는 우리가 그 자체에 대해 관심을 깊게 가질수록 자신의 존재양식인 도구성을 은폐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질문한 것

1. <세계>-곁에-있음과 세계-내-존재

질문

“<세계>-곁에-있음은 세계-내-존재에 기초하고 있는 하나의 실존주다.”라는 문장에서 <세계>와 세계는 다른 의미인가? 또한 <세계>-곁에-있음은 세계-내-존재가 성립하기 때문에 가능한가?

요약

<세계>는 하이데거 원문에 별도의 용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번역·해설에서 철학적 의미의 ‘세계’를 두드러지게 표시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안전하다.

하이데거의 Welt는 단순히 사물들이 들어 있는 물리적 공간이나 우주가 아니라:

현존재가 이미 살아가고, 활동하며, 존재자들과 관계하는 의미연관의 전체

를 가리킨다.

Sein bei der Welt(세계-곁에-있음)는 현존재가 세계의 존재자들과 친숙하게 관여하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따라서:

세계-곁에-있음은 세계-내-존재라는 더 근원적인 존재구조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단, 이것은 시간적·인과적 선후관계가 아니라 존재론적 근거관계이다.

출처: Heidegger, Sein und Zeit, §12;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Martin Heidegger”.


2. 현존재에게 ‘고유한’ Vorhandenheit와 현사실성

질문

“현존재에게는 고유한 의미의 눈앞의 존재(Vorhandensein)가 속해 있다”에서 ‘고유한’은 unique라는 뜻인가? Vorhandensein은 존재자를 표면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인가? 왜 “일정한 사실적인 눈앞의 존재”라고 표현하는가?

요약

여기서 eigen은 ‘유일하고 특별한(unique)’보다:

현존재 자신에게 속하는 / 현존재에 특유한

이라는 뜻이다.

Vorhandenheit는 보통 존재자를 실천적 사용맥락에서 떼어내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속성을 가진 대상으로 파악하는 존재방식

을 가리킨다.

따라서 Zuhandenheit와 대비된다.

  • Zuhandenheit → 존재자를 일상적 사용·의미연관 속에서 만남
  • Vorhandenheit → 존재자를 독립적인 대상으로 관찰함

그러나 §12에서 하이데거는 vorhanden을 더 넓은 의미의 “실제로 있음”으로도 사용한다.

현존재도 분명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 사실성은 돌이나 암석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존재론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그래서 “일정한(gewissen)”이라는 한정이 붙는다.

현존재도 어떤 의미에서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것을 단순한 사물의 Vorhandenheit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이 현존재 특유의 사실성을 하이데거는 Faktizität라고 부른다.

출처: Heidegger, Sein und Zeit, §12, 특히 Vorhandenheit와 Faktizität의 구별;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Martin Heidegger”.


3. Tatsächlichkeit와 Faktizität의 차이

질문

단순 사실성은 “Shawn이 서울특별시에 있다”처럼 제3자가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고, 현사실성은 “나는 강의를 듣기 위해 서울의 대학에 있다”처럼 세계와의 관계성을 포함해 이해하면 되는가?

요약

이 예시는 방향은 적절하지만, 차이를 단순히 3인칭 표현과 1인칭 표현의 차이로 이해하면 안 된다.

Tatsächlichkeit는 어떤 존재자가 단순히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가깝다.

예:

“Shawn이라는 인간이 서울특별시에 있다.”

반면 Faktizität는 현존재가 언제나 이미:

  • 특정한 세계 안에서
  • 특정한 상황과 관계 속에서
  • 다른 존재자들과 얽혀
  • 자신의 존재를 떠맡으며

존재하고 있다는 현존재 특유의 사실성이다.

따라서:

“나는 강의를 듣는 대학생으로서 이 대학에 있다.”

같은 예시는 현사실성을 이해하는 데 더 적절하다.

그러나 현존재가 반드시 자신의 상황을 명시적으로 1인칭으로 설명해야만 현사실성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현사실성은 자기서술 방식이 아니라 존재방식이다.

또한 ‘현사실성’이라는 번역은 Tatsächlichkeit에 한국어의 ‘현’을 붙여 만든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독일어 Faktizität를 현존재의 특유한 사실성으로 옮긴 번역이다.

출처: Heidegger, Sein und Zeit, §§12, 29.


4. 공간-내-존재와 현존재의 실존적 공간성

질문

현존재가 특정한 물리적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세계-내-존재에서 비롯하지만, 그 자체는 실존주가 아닌가? 또한 현존재의 공간성을 이해하려면 세계-내-존재에 대한 이해가 선행해야 한다는 뜻인가?

요약

단순히:

“현존재가 어떤 좌표나 물리적 공간 안에 존재한다.”

는 사실 자체는 실존주가 아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에게 특유한 공간성, 즉 existenziale Räumlichkeit는 세계-내-존재에 속하는 실존론적 구조다.

따라서:

물리적 위치를 가진다는 사실

≠

현존재가 세계 속에서 공간을 살아내는 실존적 공간성

이다.

현존재의 공간성을 이해하려면 세계-내-존재가 먼저 ‘개념적으로 공부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학습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현존재의 공간성 자체가 세계-내-존재를 근거로 성립하므로, 세계-내-존재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그 공간성을 존재론적으로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후속 §22–24에서 하이데거는 이 공간성을 단순한 좌표가 아니라 Ent-fernung(거리 없앰)과 Ausrichtung(방향잡음) 등의 구조로 분석한다.

출처: Heidegger, Sein und Zeit, §§12, 22–24;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Martin Heidegger”.


5. 후설의 생활세계(Lebenswelt)

질문

현상학, 특히 후설에게서 ‘생활세계’란 무엇인가?

요약

후설의 생활세계는:

과학적·이론적 추상화 이전에 우리가 이미 살아가고, 경험하고,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세계

이다.

생활세계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선이론적: 과학적·철학적 이론화 이전에 이미 경험됨
  • 선소여적: 내가 새로 만들어내기 전에 언제나 이미 주어져 있음
  • 실천적: 사물은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사용하고 관계하는 대상으로 경험됨
  • 상호주관적: 타인과 공유되는 세계
  • 역사적·문화적: 언어·관습·전통이 이미 침전되어 있음
  • 지평적: 현재 직접 보이지 않는 가능성과 배경까지 포함함
  • 과학의 토대: 과학적 객관세계 역시 생활세계에 대한 이상화와 수학화를 통해 성립함

예를 들어 커피잔은 생활세계에서 우선:

“마실 커피가 담긴 잔”

으로 경험되고, 그 뒤에야 질량·부피·온도 등의 과학적 대상으로 분석될 수 있다.

후설은 자연과학적 세계상이 틀렸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 세계 역시 생활세계라는 더 근원적인 경험의 토대를 전제한다.

고 본다.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와 동일한 개념은 아니지만, 주체가 먼저 독립적으로 있고 나중에 외부 세계와 관계한다는 도식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강한 친연성이 있다.

출처: Husserl, Die Krisis der europäischen Wissenschaften und 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 특히 §§33–38;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Edmund Husserl”.


6. in, innan, bin, bei의 어원

질문

『존재와 시간』 §12에서 in은 innan, bin은 bei와 관련된다고 설명하는데, innan과 bei도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인가?

요약

아니다. 이 대목은 하이데거가 자주 사용하는 그리스어 어원풀이가 아니라 게르만어·독일어 내부의 오래된 어형을 이용한 철학적 어원풀이다.

innan

하이데거는:

in ← innan

을 연결하면서 wohnen, sich aufhalten, 즉 거주하다·머물다라는 의미를 끌어낸다.

그러나 현대 역사언어학에서 innan은 고고독일어·고대영어·고대노르드어 등에 대응형이 있는 게르만어 계통의 단어다.

하이데거의 “innan = 거주하다”라는 설명은 Jacob Grimm의 어원설을 철학적으로 활용한 것이므로 현대 언어학의 확정적 사실로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bei와 bin

bei 역시:

  • Old High German bî
  • Old English bī
  • 현대 영어 by

등과 연결되는 게르만어 계통이다.

인도유럽조어 수준까지 올라가면 그리스어의 특정 형태와 동계어 관계가 논의될 수 있지만:

그리스어 → 독일어

로 직접 유래한 것은 아니다.

또한 하이데거의:

bin ↔ bei

연결 역시 현대 역사언어학에서 단순한 직접 파생관계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철학적 목적

하이데거의 핵심 목적은 정확한 언어학적 계보를 제시하는 데 있기보다:

In-der-Welt-sein의 in을 물체가 용기 안에 들어 있는 공간적 포함관계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이다.

즉:

In-Sein ≠ 단순한 공간적 내부에 있음

In-Sein ≈ 세계에 거주하며 친숙하게 관여하고 있음

이라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독일어의 오래된 의미연관을 활용한다.

출처: Heidegger, Sein und Zeit, §12; Jacob Grimm, Kleinere Schriften, Bd. VII; Etymologisches Wörterbuch des Althochdeutschen, s.v. innan, bî, bim/bin.


오늘 읽은 §12 이후 핵심 흐름

오늘 질문을 하나의 흐름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현존재는 세계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다가
나중에 세계와 관계를 맺는 존재가 아니다.
↓
현존재의 근본적인 존재구조는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다.
↓
따라서 세계-곁에-있음(Sein bei der Welt) 역시
세계-내-존재를 근거로 성립한다.
↓
현존재도 실제로 존재하며
물리적 공간 안에 위치한다는 점은 부정되지 않는다.
↓
그러나 현존재의 사실성과 공간성을
돌이나 물체의 사실성·공간성과 동일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
현존재의 사실성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이미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현사실성(Faktizität)이다.
↓
현존재의 공간성 역시
단순한 좌표상의 위치가 아니라
세계 안에서 의미 있게 관계하고 행동하는
실존적 공간성이다.
↓
이러한 분석은
'주체가 먼저 있고 이후 외부 세계와 관계한다'는
전통적 주체-객체 도식을 거부한다.
↓
후설의 생활세계 개념과도 이 점에서 친연성이 있지만,
하이데거는 이를 세계-내-존재라는
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로 더 급진적으로 분석한다.

오늘의 한 줄 요약

현존재는 단순히 세계라는 공간 안에 놓인 하나의 물체가 아니라, 언제나 이미 의미 있는 세계에 거주하고 관여하면서 존재하며, 따라서 현존재의 사실성·공간성 역시 세계-내-존재를 근거로 해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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